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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조의 ‘사람이 보험이다’<24>]떠나도 될까요? |
인천공항이다. 탑승구에 막 도착했다. 여기로 오기 위해서 3일 밤을 샜다. 떠나기 전에 발송해야 할 손해사정서, 보정회신서, 기획서가 있었다. 이외에도 수시로 내 계획을 무시하는 돌발상황들은 내 직업의 숙명이지만 예상 밖의 범위에서 나에게 잘 수 없다고 나를 흔들어 댔다. 돌아오면 직후에 강의며 프로젝트 미팅, 세미나까지 꽉 잡혀 있어서 돌아온 후에 하면 된다고 미룰 수도 없다.
그래도 어젯밤은 정말 간절하게 일찍 자고 싶었다. 잠을 너무 못 자서 여권을 챙길 정신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꼭 자고 싶었다. 그래서 그제 밤 무리해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할 일로 손해사정서 하나와 보정회신서만을 남겨놓았고 그 외에 사무실을 비우면 발생하는 여러 제반의 자잘한 일들을 챙기고 퇴근 시간만 피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행복한 회로를 돌렸는데 당연히 회로는 엉켰다.
뭐, 수시로 들어오는 간단한 문의들은 담담하게 해낸다. 당장 큰일 날 것처럼 전화하는 상대의 조급함에 흔들리지 않아야 많은 일들을 더 잘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여름에 4층에서 추락한 환자 가족의 전화가 걸려 왔다. 추락 이후 한 달 만에 깨어난 20대 딸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렸고 사고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암담한 상태에서 수술만 10번 가까이 받고 몇 달째 병원에 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입원해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 가족은 아기가 되어버린 딸이 너무 이쁘다고 했다. 가족의 큰 사고를 겪고 감내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신이 준 미션을 협력해서 해나가는 사람들처럼 모두 밝고 에너지가 있었다.
필자는 이 가족들에게 환자가 퇴원하기 전에 나머지 가족들이 편하게 여행을 다녀올 것을 권했었다. 환자가 재활을 시작하고 집에 오면 사고 전에 함께 집에서 지내던 다른 사람(환자)에게 적응해야 하고 맞추느라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기에 환자를 맞이하기 위한 단합대회를 다녀오라는 거였다. 그리고 환자가 퇴원하면 평범한 가족여행을 갈 날이 소원할 것을 각오하라는 뜻도 있었다. 환자의 아버지는 내 딸이 사고로 다시 태어나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새로이 맞이할 거라면서 내 말에 동의했다. 내가 보아온 사고자의 가족들 중 가장 의연하고 현명하며 차분했었다. 그 중심에는 가장인 아버지의 힘이 커 보였다. 필자를 만나서 상담할 때도 현재 얼마나 힘든지보다 어떤 문제를 예상하고 어떤 해법을 준비하고 고려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려고 했다. 당연한 것이 아니야? 싶겠지만 막상 큰일에 닥치면 사람이 고통을 걷어내고 해결에 집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 어려운 일을 잘해 내던 환자의 아버지가 통화하면서 술에 취한 목소리로 “다 죽여버리고 싶다”를 연발했다. “아버님, 힘드실 수 있죠. 오늘은 그러한 채로 지내시고 내일 전화 주세요.”
그때부터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져서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정리된 불편한 일들도 생각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떠나게 되면 어쩌나 불안하고, 무엇보다도 힘든 환자와 가족들이 있는데 내가 내일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는 사실이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안다. 그것이 이유라서 여행을 가는 것이 문제라면 필자는 평생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런데도 필자는 어디든 “좀 쉴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떠나지 못한다.
항상, “그래도 되나?” 하고 나한테 묻는다. 그리고, 나의 즐거움이 힘든 상황에 처한 의뢰인들에게 들킬까봐 염려하여 사실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불편과 불안을 조금이나마 희석하려는 것 같다.
필자도 사람인데 일만 하고 산다는 것은 나도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양극성장애 환자 의무기록을 보면서 나도 이럴 때가 있는데 싶고, 심근경색 환자 초진기록지를 보면 나도 막 가슴이 쪼이는 거 같다. 나도 힘들면 아프고 지칠 수 있는 사람인데 일하다가 지쳐서 책상 옆에 소파에 쪼그려 누워 쉴 때가 맘은 가장 편하다.
이런다고 의뢰인이 더 고마워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휴일에 신나게 논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그래도 나는 그냥 내가 너무 신나는 것도, 너무 편한 것도 그냥 막연히 누군가에게 미안하다. 남들은 여행 가면 즐겁고 재밌는 경험을 공유하느라 SNS가 불이 나는데, 나는 오히려 누가 내 즐거움을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긴장한다.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이 누군가를 돕게 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오늘 오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사정사님, 우리 할 수 있는 것 다 했으니 괜찮아요.”
“아버님, 우리 다시 힘내요”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버님, 이제 저 좀 다녀와도 되죠?”라고.
다행이다. 그나마 발에 걸린 것 같은 족쇄 하나는 풀고 가는 기분이다. 다녀와서 여러분 힘든 얘기 더 들어 드릴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보험신문> 한국보험신문
이현조 손해사정사
손해사정법인 하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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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조 thinkinsuran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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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22:57: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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