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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의 ‘50’s 라이프 플러스’]나는 행복한 ‘시지프’ 입니다 |
- 조급함과 욕망이 오히려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습니다. 나는 이제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
알베르 카뮈는 “삶은 선택과 순간들의 총합이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찬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에서 그는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말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선택의 자유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오십이 넘어서야 저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너무 애쓰지도 말자”. “그래도 괜찮다”라는 사실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소위 ‘부’와 ‘행복’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패배자의 구차한 변명이고 비겁한 타협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글을 읽는 당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오십이 넘으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고 문학도와 예술가가 됩니다. 농부가 되어 자연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고, 누군가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불러내어 작가가 되기도 하며, 어떤 이는 희로애락을 하얀 여백에다 토해 냅니다.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바로 이거였지!” 하면서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면서 말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내 주변의 평범한 것들 그러니까 우연한 삶의 연속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에 내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또 다른 길을 가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본질이라면 왜 좀 더 빨리 진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무엇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을까 자문합니다.
연극 배우들은 다양한 배역을 소화합니다. 어떤 무대에서는 ‘장발장’이 되었다가 다시 ‘자베르’가 되기도 하며 ‘젊은이’가 되기도 하고 ‘노인’이 됩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면 그는 언제나 본래의 ‘나’로 돌아옵니다.
나는 그동안 무대 위 연극 배우처럼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공연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나는 매일매일 다른 배역을 맡으려 애썼고 조금 더 위로 성장하고자 했던 지난날 나의 조급함과 교만이 오히려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욕망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하더군요. 돌이켜 보면 나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으로 불안했고, 욕망이 채워지면 또 다른 권태로 불안했습니다. 끊임없이 모자람을 포장해야만 했던 삶은 평범한 소망과 기쁨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시지프 신화’에서 매일매일 바위산으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 아이러니지만 힘들게 굴려 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면 또 굴려 올려야 하는 반복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시지프’는 나름 행복합니다. 그는 “이번에는 돌이 굴러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다”라는 쓸데없는 희망은 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냥 오늘도 돌을 굴려 올립니다. 하루하루의 행동이나 생활에 최선을 다하여 만족하는 것이지요.
지금은 내 삶을 좀 더 윤택하고 밀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내 주변에 어느 곳이든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스럽게 만들어 가는 그것, ‘시지프’가 매일매일 가졌던 마음 아닐까요?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 中에서 -
삶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목적 있는 삶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고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나는 이제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 著)’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자꾸 작아지고, 다른 사람의 삶이 더 신경 쓰이고 부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나는 부조리(나의 인식과 현실의 차이)한 삶에 대해 저항하지 못했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일찍 더 나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또 다른 길을 가지는 않았을까?”라는 자문에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면 일어났을지 모르는 공상을 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라고…….
‘큰바위얼굴’을 기억하시죠. 주인공 ‘어니스트’는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이 마을 출신 중에 큰바위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란 전설을 들었습니다. ‘어니스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인물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느 시인이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고 ‘어니스트’가 바로 ‘큰바위얼굴’과 똑같다고 얘기합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하루하루의 생활에 충실할 때 나는 ‘행복한 시지프’가 되고 ‘큰바위얼굴’로 변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보험신문> 한국보험신문
김태우 센터장
한화생명 63FA센터(Financial Advisory Center)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한국보험신문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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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cfpkim@hanwh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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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22:39:1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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