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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의 수난 |
가을 장맛비가 지나간 뒤 날씨가 확실히 달라졌다. 아침 저녁은 완연한 가을이다. 그러나 한낮 햇살은 여전히 뜨겁고 날카로워 산책객으로하여금 그늘 방패를 찾게 한다.
서대문 사거리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서소문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떠가는 듯 그대 모습 /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 아침 찬바람에 지우지 /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 우~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 우~우 아름다운 세상’
이문세가 부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는 제목의 발라드 장르 노래다. 1988년 9월 발매된 이문세의 5집 음반 타이틀곡으로,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으로 시작되지만 이 부분의 노랫말과 가락이 참 좋다. 시기적으로도 이맘때와 딱 맞는 듯한 느낌이다. 문득 노랫속 그늘을 만든 가로수가 궁금해졌다. 그늘을 만들 정도라면 잎이 넓고 풍성해야 하는데 어떤 나무일까. 마침 걷고 있는 길을 따라 나무 그늘이 형성돼 올려다보니 플라타너스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의 가로수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라고 들었던 것 같다.
플라타너스의 우리말 이름은 양버즘나무이다. 머리 부스럼 자국이 먼저 떠올려지는 양버즘나무보다는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운치있고 낭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내려가는 통일로 서편 가로수의 주종은 플라타너스이다. 수령이 50년쯤 됨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온갖 시련과 풍파를 헤치고 모진 세월을 견디며 넓은 잎을 풍성하게 피워 그늘을 선사하고 있다. 재개발이 완료된 동편에는 플라타너스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뤄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 서대문 경찰서 부근과 서소문 아파트 일대가 재개발되면 이곳 플라타너스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느티나무, 벚나무, 소나무, 이팝나무, 배롱나무, 단풍나무, 대왕참나무 등에 밀려 점점 수가 줄고 있지만 플라타너스는 은행나무와 함께 가로수로 인기 품종이었다. 성장이 빠른데다 매연 등 공해에도 강하며 이산화탄소 흡입과 산소 배출량이 많고 토양을 정화시키는 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1980년대까지 새로 뚫린 길의 가로수로는 플라타너스가 단연 1순위에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옆으로 뻗은 가지와 넓은 잎이 도로 표지판과 상가 간판을 가리고 웃자란 뿌리가 보도블럭을 튀어나오게 함으로써 이를 교체하느라 예산을 깎아 먹고 꽃가루와 열매의 솜털이 알레르기성 비염과 결막염 등을 일으킨다는 등의 민원이 늘어나면서 원성의 대상이 됐다.
요즘 오랫동안 도시 가로수의 양대 축이었던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수난을 맞고 있다. 늦가을 샛노란 잎으로 거리를 장식하는 은행나무는 열매 때문에,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막아줬던 플라타너스는 널따란 잎 때문에 사정없이 매를 맞고 가지가 뭉텅 잘려나가 몸통만 남거나 아예 베어지기도 한다.
며칠 전 덕수궁에서 정동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데 요란한 기계음에 섞여 열매 등이 우루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다가가서 보니 인부들이 굴삭기에 부착한 진동수확기로 은행나무 열매를 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를 땅에 떨어지기 전 수확하는 것으로 10월 말까지 서울시 전역에서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나무 위쪽 열매는 사다리차를 동원해 긴 장대 끝에 낫이나 갈고리를 달아 가지째 잘라낸다. 해마다 폭염이 지나면 반복되는 일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지자체마다 은행나무 열매가 집중적으로 떨어지기 전 서둘러 수확해 악취와 보행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구상에서 ‘은행나무 열매 악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동길 은행나무의 수난은 약과다. 심할 경우 몸통만 남아 토르소 신세가 되거나 뿌리째 뽑혀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에서 충정로 역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 양쪽 은행나무는 몸통만 남아 스산하다. 농협중앙회, 농협금융지주, 농협은행, 농협손해보험 등 농협 관련 본사가 모여있는 서대문 역 사거리 일대는 2000년대 초 농협금융타운 조성과 함께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 대신 소나무가 들어섰다.
모든 것은 세월과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가치가 달라진다. 도심 산책로에서 만나는 가로수도 예외가 아니다. 평소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언젠가 사라져 다시 못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달리 보이고 경외감마저 들었다.
[한국보험신문=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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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 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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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9 22:53: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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