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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청와대 만추서정(晩秋抒情) |
계절적으로 가을의 끝자락이고 겨울의 초입이다. 아직 11월 달력을 넘기지 않은 만큼 초겨울보다 늦가을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늦가을은 한자어로 만추(晩秋)다. 영화 ‘만추’의 잔영이 짙기 때문인지 늦가을 대신 만추라는 단어를 쓰면 왠지 있어 보이는 듯하다. 낙엽이 뒹구는 공원 벤치에서 끝내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주인공의 고혹적인 모습. 영화는 여러 번 리메이크됐지만 원작이든 최근작이든 엔딩 장면은 그대로다.
늦가을 서울 도심 산책로로 청와대를 추천한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 찾으면 영화처럼 쓸쓸한 느낌의 만추(晩秋)가 가을의 진수로 가득한 풍성한 만추(滿秋)임을 절감하게 될 터. 특히 청와대 내엔 햇살이 곱게 내리는 양지가 의외로 많아 따사한 햇볕이 고파질 때 가면 더 좋다. 이에 지난 주말에는 만만보 산책로 장소로 청와대를 골랐다.
때마침 문화체육관광부가 임기 반환점을 맞은 윤석열 정부의 문화예술·체육·관광 분야 주요 성과로 청와대 개방을 맨 위에 올렸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청와대는 윤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 2022년 5월 10일 개방됐다.
문체부는 지난 19일 “대통령만의 공간이었던 청와대를 역사·문화예술·문화유산·수목의 4개 핵심 콘텐츠에 기반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구성해 2년 6개월 동안 총 100회 이상의 음악회·기획전시·장애예술축제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면서 “현재 누적 관람객 658만명을 돌파해 짧은 기간 내에 도시와 자연을 잇는 대표 명소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도 청와대의 가을 풍경과 정취를 담은 휴대폰 사진을 공모하는 ‘청와대 모바일 사진전’이 열려 들르는 관람객이 많았다.
청와대에 들어가려면 일반 국민은 온라인 예약을 해야 한다. 개방 초기에는 열흘 가까이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예약자가 넘쳤으나 지금은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당일 현장에서 예약해도 바로 입장할 수 있을 만큼 한산해졌다.
문체부 청와대재단에 따르면 청와대 관람객은 개방 첫달인 2022년 5월(10~31일) 57만4380명에서 이후 점점 줄어 그해 12월에는 11만7319명까지 감소했고 올해는 2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기록한 달은 5월(20만2909명) 한 달 뿐이고 대부분 10만명 남짓에 그치고 있다.
청와대 관람객 10명 중 8~9명은 대통령이 집무를 보고 외빈 접견 때 사용한 본관과 대통령과 가족의 생활공간인 대통령 관저 등 푸른 기와를 올린 건물들만 대충 둘러보고 나온다. 사실 청와대 내 건물은 ‘대통령’ 타이틀을 빼면 매력적인 콘텐츠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나중에 또 와 보고 싶은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청와대의 진수는 주변 풍광에 있다. 건물이 아니라 나무와 풀꽃, 숲 등 자연이다. 필자의 올해 청와대 산책은 지난 봄과 여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박상진 경북대 산림학 명예교수가 대통령 경호처의 의뢰를 받고 펴낸 ‘청와대의 나무와 풀꽃’을 보면 청와대에는 5만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도심 속 통제구역이었던 만큼 귀한 나무와 풀꽃이 많으며, 이 나무와 풀꽃이 계절마다 그림같은 풍광을 선사한다.
청와대 본관에서 나와 대정원을 한바퀴 돌아 불로문을 통해 소정원으로 향한다. 창덕궁 후원 애련정 옆 석문인 불로문(不老門)을 본떠 만든 청와대 불로문은 한국을 방문한 각국 정상이라면 누구나 들르던 외교 명소다. 미국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도 2017년 11월 방한 때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이 문을 지났었다. 그는 김 여사가 “불로문 아래를 지나가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말에 여러 번 오갔다는 후문이다.
소정원 산책로는 아직 가을이었다. 이상기후로 단풍 산행의 묘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청와대를 찾아 소정원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보기 바란다. 곱고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다. 청와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녹지원은 반송(盤松), 적송(赤松), 향나무, 회화나무, 모감주나무, 말채나무, 산딸나무, 동백나무 등 고목의 기품 넘치는 자태가 백미를 이룬다. 청와대에는 현재 100년이 넘은 고목이 40여 그루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나무는 옛 본관이 있던 수궁터 옆 주목으로 올해로 수령 744년을 맞았다.
녹지원에서 소정원을 지나 대정원 정문으로 나오는 귀로에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니 청와대 낙엽 활엽수 대부분 서둘러 잎을 털어내며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목의 겨울 준비는 매우 간단하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추운 겨울 수북이 내리는 눈의 무게를 최소화할 수 있다. 정작 청와대를 국민에게 내준 윤 대통령은 요즘 마음의 무게가 천근만근일 것이다. 그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지 않고 청와대에 그대로 남아 관람객과 함께 청와대 경내를 천천히 걸으면서 소통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청와대에 한번이라도 가 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게 된다. 권력자의 불통 문제는 장소와 거리가 아니라 정치 철학과 삶의 태도가 좌우한다는 것을.
[한국보험신문=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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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 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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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22:47:1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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