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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의 ‘만만보(萬漫步) 산책’]단풍들지 못한 ‘젖은 낙엽’ |
이맘때 가로수가 잘 조성된 산책로는 곱게 물들었다가 내려앉은 낙엽으로 융단길이 된다. ‘만만보 산책’ 단골 장소인 정동길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잎으로 노랑 바탕에 빨강 무늬 카펫을 이루곤 하는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운치가 예전만 못하다. 특히 늦가을 정동길 낭만의 상징으로 통하는 은행나무 잎은 아직 녹빛이 강하고 그마저 악취 예방을 위한 열매 조기 채취 과정에서 대거 훑어지고 갑작스런 찬바람에 서둘러 떨어지는 바람에 몹시 가난해 보인다. 확실히 기후변화로 가을이 짧아지면서 나뭇잎은 봄꽃보다 예쁜 단풍으로 피어날 기회를 점점 상실하고 있다.
지난주 날씨는 무척 변덕스러웠다. 직전 주말에는 서울 낮 최고기온이 25도까지 올라 여름 옷을 다시 꺼내게 하더니 주초에는 강한 비바람 직후 급격히 영하로 떨어져 하루 사이 반팔에서 두꺼운 패딩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서리도 내렸다. 서리는 대기 중 수증기가 물체 표면에 얼어붙은 것으로, 곧 겨울이 닥치니 서둘러 준비하라는 자연의 신호이다. 서리가 내리면 등산로와 산책길에서는 미끄러짐 사고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낙엽을 젖게 만들어 조심하지 않으면 경사가 급한 산길에서는 물론이고 도심 산책로에서도 미끄러짐 사고를 유발하기 일쑤다.
서리가 내린 아침이나 비온 뒤 낙엽 많은 길을 걸을 때는 평소보다 속도를 늦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낮이더라도 가급적 그늘진 곳을 피하고, 추운 날에는 장갑을 착용하도록 한다. 춥다고 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평형 감각이 무더져 미끄러지기 쉽고 산길에서는 치명적 사고를 부르는 낙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늦가을에는 기온이 영상이더라도 산의 지표면은 0도 이하가 될 때가 많을 뿐더러 공기가 수증기를 다량으로 품고 있을 경우에는 서리가 3~5도에서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겉보기에 바짝 말라보이는 낙엽도 피하는 것이 좋다. 안쪽은 서리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버섯 캐러 산에 오른 40대 남자가 젖은 낙엽을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추락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젖은 낙엽은 교통안전사고의 위험을 높이기도 한다. 낙엽이 물에 젖어 있는 도로는 비오는 날 운전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도로교통공단은 젖은 낙엽은 그 자체로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노면과 타이의 마찰력을 떨어뜨려 제동거리가 길어지게 되므로 낙엽 많은 도로에서는 감속 운전을 하도록 권하고 있다. 낙엽은 또 도로 배수구를 막아 침수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로 들어가 냉각 기능을 떨어뜨려 엔진 과열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낙엽이 자동차 전면 유리나 보닛에 쌓이면 바로 제거하는 것이 좋다.
축축한 낙엽을 피하느라 땅을 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문득 ‘젖은 낙엽’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떠올려진다. 젖은 낙엽은 일본어로 ‘누레오치바(ぬれおちば)’라고 한다. 1980년대 일본 주부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할 일이 없어 집 안에 죽치고 들어앉은 남편을 ‘누레오치바’라고 불렀고, 이 말이 1989년 ‘올해의 유행어 대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으로 퍼지게 됐다. 구두나 몸에 붙으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가사를 도와주지 않는 늙은 남편을 빗댄 말로 당시 은퇴 후 남자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흐르고 평균수명도 20년 이상 길어졌지만 남자의 노후 인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구온난화에 단풍으로 피어나지 못하고 진녹빛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젖은 낙엽으로 보내는 기간만 길어질까 봐 괜스레 가슴이 뜨끔해진다. 곧 겨울이다. 겨울 빙판 산책길과 눈 덮힌 등산로는 훨씬 미끄럽고 위태롭다. 노후는 인생의 겨울이다. 은퇴 후 인생이 젖은 낙엽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겨울을 나기 위해 단풍을 포기하고 서둘러 잎을 털어내는 산책길 가로수를 보면서 또 하나 배운다.
[한국보험신문=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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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엽 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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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22:39:5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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